정부재정

*이 글의 동영상은 유튜브 채널 ‘kcef21’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1xiIhQqtRyo

 

어느 정권이나 출범 첫해에는 자신의 이념 색깔을 분명히 하고 싶어 합니다. 정권의 정치이념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분야는 정부 재정이지요. 진보는 큰 정부나 복지확대를 내세우는 경향이 있고, 보수는 작은 정부나 세금 인하를 추진하는 경우가 많지요. 특히,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경우 이런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미국의 레이건과 트럼프 행정부 때 대대적인 감세정책이 있었던 것이 좋은 사례입니다. 

진보에서 보수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한 윤석열 정부의 경우도 법인세 최고세율을 25%에서 22%로 낮추겠다고 공약을 했고, 이것이 올해 정부 세제개편안의 핵심 사안입니다. 

결론부터 말해, 지금은 법인세율 대폭 인하를 추진할 적기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일단, 여당이 의회 소수당이라 법안 통과가 힘들다는 이유가 크고, 경제적 타당성 측면에서도 생각해볼 요소가 적지 않습니다. 

대안으로, 세수감소가 덜하고, 실효성도 높으며, 야당과의 타협도 가능해 보이는 전략산업 투자 유인에 초점을 맞추는 게 나아 보입니다. 만일 정치적 타협이 가능하다면 1%p 정도 명목세율을 낮추면서 4단계로 되어있는 복잡한 과표 구간을 1-2 단계 줄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법인세율 인하가 불안한 이유 세 가지]

제가 법인세율 대폭 인하를 불안한 정책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다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지금은 정부재원이 더 필요한큰 정부의 시대로 시대조류가 바뀌고 있습니다. 이럴 때 무리한 감세를 하면 영국 트러스 행정부 실패에서 보듯 역효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나라는 다른 선진국과 달리, 법인세가 세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습니다. 이럴 때 다시 되돌리기 힘든 구조적인 감세조치를 하면 재정 리스크가 커질 수 있습니다.

셋째, 기업의 투자 촉진이 핵심 목표라면 세수비용이 큰 보편적 세율인하보다, 타겟을 분명히하는 투자유인 방식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근거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지요. 

 

[#1. 대규모 감세는 큰 정부로 가는 시대조류 역행]

첫째, 일반적인 관념과 달리, 현실에서의 정부 크기는 집권당의 정치이념이 아니라 시대조류를 따라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재정전쟁> 5큰 정부,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참조]. 그런데 지금은 시대조류가 세계화나 시장주의에서 벗어나 큰 정부, 적극적 정부로 향해가는 시기입니다. 불평등이나 고령화에 대처하기 위한 복지지출, 기후변화나 에너지 수급과 관련된 지출, 날로 심해지는 자국 중심주의에 대처하기 위한 전락산업 지원 등 정부 재정에 대한 수요가 커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시기에 세수 비용이 큰 세율 인하를 하면 재정 리스크가 커질 수 있습니다. 얼마전 영국의 트러스 총리가 무리한 감세정책을 밀어부치다 역대 최단명 총리로 불명예 졸업한 것이 좋은 사례입니다. 1980년대 초반의 레이거노믹스를 흉내냈다고 하는데, 그 때는 지금과는 반대로 큰 정부에서 작은 정부로 시대조류가 바뀌던 시대였습니다. 

이 얘기는 얼마전 찍은 제 동영상 영국의 감세정책이 실패한 이유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2. 구조적 세수 감소에 따른 재정 리스크] 

둘째, 우리나라의 조세구조는 다른 선진국과 달리 법인세 비중이 매우 높습니다. 그래서 같은 크기의 세율인하라 하더라도 세수 감소가 클 수 있습니다. 요즘은 개인소득세 비중이 높지만, 예전에는 법인세가 전체 세수의 15% 정도를 차지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물론 요즘도 10% 수준을 훌쩍 넘습니다. 따라서 법인세수 비중이 높지 않은 미국 같은 나라와 평면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법인세수 비중이 높은 이유는, <재정전쟁> 10, 15장 참조]

정부와 국회예산정책처의 추정치를 보면 이번 세제개편안으로 인한 세수감소 규모가 향후 5년간 대략 60조원~74조원 정도, GDP3~4% 수준입니다. 작지 않은 규모지요.

그 동안 법인세수가 예상보다 더 걷혔기 때문에 다시 돌려주는 의미가 있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설득력이 별로 없습니다. 요즘처럼 경제 불확실성이 높을 때는 정확한 세수 예측이 어렵습니다. 이런 우발적 요인과 세율 인하 같은 구조적 세수 감소 요인은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세율은 내리기는 쉬워도 다시 올리기는 어렵기 때문에 충분히 생각하고 준비해 레이건이나 트럼프의 감세정책처럼 적기에 치고 들어가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3. 법인세율 인하보다 전략산업 투자유인에 집중]

셋째, 기업에 대한 지나친 세부담이 투자를 저해할 수 있다는 것은 맞는 명제입니다. 그런데, 기업이 투자할 때는 금리나 조세 같은 비용 요인 못지 않게, 향후 수익성을 따집니다. 지금 같이 불확실성이 큰 시기에는 감세의 투자효과가 기대만큼 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부가 법인세 인하의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 인용한 국제기구 연구들은 다양한 나라가 포함된 샘플을 쓰기 때문에 특정국가 사례에 적용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사실, 저 자신도 박사과정 시절, 미국의 1980년대초의 법인세 인하가 기업투자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는 논문을 제 지도교수인 마틴 펠트스타인(Martin Feldstein) 교수와 공저로 낸 적이 있습니다. 그 논문은 당시 미국의 경제환경을 체계적으로 반영하는 방식으로 썼기 때문에 저는 지금도 그 결과를 믿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시대와 장소가 다른 지금의 우리나라 경우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재정학을 제대로 배운 학생이라면 기억하겠지만, 법인세율은 모든 자본스톡에 해당되고, 투자유인은 신규 투자에만 해당됩니다. 소위 ‘Old capital vs. new capital’ 문제입니다.

정책의 목적이 투자 확대라면 모든 자본에 영향을 주는 세율인하 보다 투자세액 공제처럼 신규투자에만 적용되는 투자유인이 비용효율적인 선택이지요. 물론 정책의 목적이 기업 세부담 자체를 낮춰주는 것이라면 법인세율 인하가 맞는 선택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법인세 부담은 유난히 소수 대기업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신규투자가 아닌 기존투자까지 세금 혜택을 주면 부자과세 논쟁에서 비껴 가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재벌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는 <재정전쟁> 14이건희 상속세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참조]   

경제가 불확실하고, 세수 확보가 절실한 현재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조세수입의 구조적 감소가 우려되는 명목세율 인하 보다는 핵심 전략산업에 투자 유인을 집중해 주는 편이, 더 작은 비용으로 더 확실하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우월한 방식입니다. 나아가 야당의 협조도 받기 쉬울 것으로 보입니다.

 

[향후, 법인세율 인하가 필요할 수도: 국제적 조세회피와 시그널 효과]

지금까지 3%p 수준의 법인세율 인하가 불안한 이유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법인세율 인하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두 가지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첫째, 요즘같이 국제자본이동이 자유로운 상황에서는 다른 나라와 명목세율 격차가 벌어지면 국제적 조세회피의 대상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둘째, 명목세율은 눈에 띄기 때문에 국제 비교의 관점에서 시그널 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A국은 명목세율은 30%인데 투자유인이 많아 실효세율은 20%라 합시다. 반면 B국은 명목세율은 25%인데 투자유인이 별로 없어 실효세율은 23%라 합시다. 이 경우, 전문가가 아니라면 명목세율이 낮은 B국이 더 투자친화적이라 보기 쉽습니다. 절대 무시 못하는 효과이지요. 

지난 수년 간의 추세를 보면 우리나라 명목세율은 그대로인데 국제 평균은 다소 낮아지는 추세에 있습니다. 하지만, 큰 정부로 가는 시대조류가 본격화되면서 다시 세율이 높아지는 조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영국의 경우 법인세율을 19%에서 25%로 높이는 계획을 잡았었는데, 이를  트러스 행정부가 폐기하려다 역풍을 맞고 취소했습니다. 

 

[새 정부의 합리적 선택은?]

저는 장기적, 구조적 관점에서 기업의 법인세 부담을 낮추어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명제 자체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또한, 명목세율이 갖는 시그널 효과나 조세회피에 대한 시사점도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같이 불확실한 시대 상황에서는 효과는 애매한데 세수 비용은 큰 대폭의 세율인하가 그다지 적절해보이지 않습니다. 영국 사례에서 보았듯 구조적 세수 감소가 초래할 수 있는 재정 리스크를 우습게 보면 안됩니다. 

특히, 지금은 자국 우선주의가 득세하며 전략 산업 지원에 모두가 열을 올리고 있는 시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전략산업 투자에 조세지원을 집중하는 것이 정책 실효성도 높이면서 재정 리스크를 훨씬 줄일 수 있는 선택입니다. 세율 인하는 다수당인 야당의 협조를 받기 어렵지만, 반도체 지원 등은 얼마든지 여야 공조와 협력이 가능한 분야입니다. 

새 정부가 출범한 마당에 뭔가 보수정권의 시그니쳐 정책을 더 내세우고 싶다 한다면, 차라리 투자 환경을 크게 향상시킬 규제혁신에 집중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보편적 성격의 세율인하에 비해 규제완화는 선별적으로 타겟을 설정하기 쉽기 때문이지요. 

정치적으로 소수당이고, 재정 실탄도 넉넉치 않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이런 저런 정책을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방식은 실효성도 없으면서 정부의 신뢰 자산만 낭비할 수 있습니다. 정권의 색깔을 내보이며 의미 있는 정책 추진을 하려면 쿨하게 현실을 직시하며 한 두 가지에 집중하는 편이 낫지 않나 봅니다.

그리고 세율인하는 장기 과제로 두고 관망하되, 혹 이번에 정치적 타협이 가능하다면 1%p 정도의 세율 인하와 함께 과표구간을 지금의 4단계에서 2-3단계로 줄이는 정도는 나빠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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